정적만이 가득한 시골길, 가족들과 함께 피크닉을 가던 줄리는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다섯 살 난 딸 안나를 잃는다. 한순간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은 줄리는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과 흔적들, 심지어 남편이 쓰다만 곡까지 버리곤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난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세상과도 단절해 버린 채 고독한 나날들을 보내던 줄리는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의 동료이자 자신을 줄곧 사랑해 왔던 남자 올리비에가 남편의 유작을 완성 시키려 한다는 사실과 남편에게 숨겨 둔 애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BHIFF NOTE

비노쉬는 <퐁네프의 연인들>(1991)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한 이후, 루이 말, 앙드레 테시네, 샹탈 애커만 등 거장들과 차례로 작업하면서 배우로서 전성기를 마음껏 누렸다. 특히 그녀의 1990년대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꼽으라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블루>(1993)를 빼놓을 수 없다. 레오 까락스의 아프로디테였던 비노쉬는 줄리 캐릭터를 만나면서 한층 성숙해졌고, 스크린에 상처 입은 영혼을 토해내듯 단단한 내면 연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누구나 <블루>를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른 것은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는 비노쉬의 상징적인 얼굴이다. 그녀만의 짙은 목소리를 간직한 얼굴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삼부작은 프랑스 국기의 색이자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해 다룬다. 비노쉬를 필두로 줄리 델피, 이렌느 야곱이 각각 주연을 맡았다. 첫 작품 <블루>는 1994년 국내 개봉 당시 화제작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난해한 영화로 정평이 나 있다. 영화에 숨겨진 메타포나 유럽연합(EU) 통합의 알레고리가 과도하게 부각 되면서 영화 해석(의미 중심)에 집착하게 만든 경향이 있다. 이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세계를 예술영화라는 낙인과 더불어 미지의 낙원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블루>에는 자유, 평등, 박애의 세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런 기호와 해석의 세계는 잠시 잊어도 좋다.

퐁네프 다리 위를 안방처럼 뛰어다니던 열혈 소녀가 어느새 행복한 가정을 가꾸는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하다. 영화는 가족과 여행을 가던 줄리가 교통사고로 작곡가 남편과 어린 딸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식을 회복한 그녀의 커다란 눈(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이제 혼자만 살아남은 세상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맞서야 한다. 자살 시도조차 실패한 그녀는 집을 매각하고 가족과 함께한 순간을 모두 지우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단절과 도피를 선택한 줄리는 파리 도심 속에서 고독한 존재로 머물고자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한 줄리가 자신의 가정을 장식하던 블루 크리스탈 모빌과 결혼반지를 버리지 못한 것처럼, 잊으려는 노력은 본디 불가능한 시도이자 오히려 정신적 억압을 낳을 뿐이다. 심지어 집에 있는 쥐들(가족을 상징)에 공포를 느낀 그녀가 고양이를 이용해 죽인 후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거창한 상징과 영화적 인과율에서 벗어나 일상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블루>는 상실과 애도에 관한 작업이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신의 대표작 <십계>(1989)에서 영화적 테마로 믿음과 신념이 붕괴되는 순간을 제시해왔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줄리 역시 그런 경우다. 줄리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애도 대신 회피(배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묘지에 방문하지 않는다). 애도는 떠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살아남은 자들이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슬픔을 치유하는 작업이다. 줄리는 스스로를 절망의 늪에 빠뜨리지만, 영화는 지극히 아름답고 심오한 방법으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멜랑콜리에 젖은 줄리의 얼굴에 불현듯 푸른빛이 찾아온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녀의 비애를 감싸 안고 위로하듯 수차례 빛을 선사한다. 이 눈부신 취광은 그녀가 상실을 넘어 열정적인 삶으로 복귀하도록 이끌고 있다. 외유내강을 추구하는 비노쉬는 특별한 대사 없이 기적처럼 찾아온 변화와 회복의 순간들을 섬세한 얼굴 표정으로 담아내고 있다.

만약 키에슬로프스키와 좀 더 소통하고 싶다면 삼부작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분신(도플갱어)과 죽음(상실)을 다루고 있는데, 베로니카를 찾아온 빛(거울)과 유리구슬 등을 보면 <블루>의 줄리와 여러 지점을 공유하고 있다. _전종혁 영화평론가